1. 올해의 아티스트

박재범

솔로 커리어의 시작과 함께 숙명처럼 따라붙은 자기증명의 과제와 그에 따른 힙합 커뮤니티의 눈초리는 야박했지만, 근 몇 년 사이 박재범이 걸어온 발자취는 이 모든 걸 불식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그의 2017년은 아티스트로는 커리어 하이의 순간에서 출발했고, 그럼에도 개인 작품 활동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해를 돌이켜보았을 때, 단순히 아티스트 박재범만을 기념하기엔 모자람이 있어 보인다. 스스로 정점에 이른 순간, 다음으로 개인의 영광만이 아닌 더 폭넓은 패밀리의 탄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AOMG도 굳건했지만, 하이어 뮤직(H1GHR Music)을 설립하며 다음 세대의 시작을 손수 열었고, 여기에는 새로운 세대를 향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 동반되었다. 더군다나 락 네이션(Roc Nation) 합류라는 깜짝 소식으로 지역적 경계까지 넓혔으니, 확실히 2017년 박재범이 보인 움직임과 영향력이 막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끼

도끼(Dok2)가 힙합 씬에 등장한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사실 이쯤이면 클리셰화되는 것을 피해가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미지가 굳어지고, 발전이 멈추며, 자연스럽게 플레이어와 리스너들에게 받을 수 있는 리스펙의 범위는 점차 줄어든다. 도끼 역시 한때 그러한 늪에 빠지는 듯했다. 반복되는 머니 스웩으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의견을 그렇다 쳐도, 랩이 항상 똑같다는 비판이 전보다 더 많아져 왔다. 2017년의 도끼는 이 같은 지적을 깔끔하게 불식시킨다. 항상 잘해왔던 도끼지만, 랩스킬적인 측면에서 이제는 정말 경지에 도달한 수준이 됐고, 그루비룸(Groovy Room)과 그레이(Gray) 같은 역량 있는 프로듀서들을 앨범 전담 프로듀서로 두며 자신의 색깔을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우탱클랜(Wu-Tang Clan)의 인스펙타 덱(Inspectah Deck), 마스타 킬라(Masta Killa)와 콜라보하기까지 하며, 여러모로 임팩트 있는 행보를 보였다. 도끼의 2017년은 매번 자신에게 씌워지는 낡은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트렌디함과 프레쉬함을 유지하는 도끼였기에 가능했다.

지코

지코(Zico)의 2017년은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니 앨범 [TELEVISION]을 통해 솔로 커리어를 확장한 것. 이 과정에서 지코는 음원 차트에서의 호성적과 화제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사로잡는다. 둘째, <쇼미더머니 6>에 참여해 걸출한 결과를 쟁취한 것. 행주가 우승을 차지하고 “요즘것들”, “Red Sun”이 흥행을 기록하는 데 있어 프로듀서 지코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셋째, 변함없이 탄탄한 그룹 활동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는 것. 지코는 블락비(Block B)의 중심축으로 집단의 음악성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고, 결과적으로 준수한 성과도 함께 거뒀다. 확실히 올 한해 그의 활약은 고무적이었다. 지코는 원체 뛰어난 다재다능함을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줬다. 매 순간이 최고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코가 올 한해 가장 빛났던 별 중 하나임은 분명 부정할 수 없다.

식케이

식케이(Sik-k)는 2017년, 음악적으로 구설수가 가장 많은 힙합 아티스트였다. 지난 6월, EP [H.A.L.F(Haver.A.Little.Fun)]가 발매됐을 때, 힙합 커뮤니티는 그를 조롱하는 투의 말인 '트래비스쑥갓'으로 들끓었다. 준수한 결과물을 내놨지만, 레퍼런스 논란은 일종의 낙인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절대다수의 공감을 끌어내긴 역부족이었다. 일반적으로 봐도 분야를 막론하고 이 같은 인식을 뒤집는 건 매우 힘들며, 보통은 제풀에 꺾여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9월, 발표된 또 다른 EP [BOYCOLD]는 그런 식케이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앨범을 통해 조금 더 완숙된 음악을 선보이며 자신의 말이 그저 말에 지나는 게 아니라는 입증했다. 여기에 2017년을 통틀어 손에 꼽힐 만큼 상당했던 작업량까지, 식케이는 올해 음악가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격상시켰다.

그루비룸

사실 프로듀서가 올해의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한국힙합에 대해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프로듀서 팀이 바로 그루비룸(Groovy Room)이다. 그들은 한 해 동안 소속 레이블 하이어뮤직(H1GHR Music)을 비롯해서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작업뿐만 아니라, 도끼(Dok2)의 [Reborn]을 전곡 프로듀싱하고, 첫 EP [EVERYWHERE]을 발표하는 등 엄청난 양의 작업물을 쏟아냈다. 그 결과, 시그니처 사운드인 'Groovy Everywhere'는 청자에게 품질 보증 수표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루비룸은 어쩌면 한 프로듀서가 평생 이루기 힘든 업적을 2017년 한 해에 다 이뤘다고도 할 수 있다.

리듬파워

‘따로 또 같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리듬파워(Rhythm Power)에게 2017년은 개인의 성공과 그룹의 확장을 동시에 경험한 해였다. <쇼미더머니 6>에서 극적인 우승을 거머쥔 행주, 첫 솔로 앨범 [Night Vibe]를 통해 의외성을 보여준 보이비(Boi B), 두 동료의 활약을 양적, 질적으로 지원했던 지구인까지, 셋은 한 해 동안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했고,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열매까지 거뒀다. 그룹으로서의 활동은 어떠했나. 그들은 그라임에 대한 높은 장르 이해도를 보여준 “방사능 (Bangsaneung)”과 리드미컬한 팝 트랙 “동성로”로 ‘B급 정서 그룹’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리듬파워는 한 해 동안 꾸준하면서도 새로웠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2017년의 리듬파워는 뭉쳐서도 잘 살았고 흩어져서도 단단했다.

2. 올해의 신인 아티스트

디피알 라이브

디피알 라이브(DPR Live)는 역대 한국힙합 신인 중에 가장 혜성처럼 등장하여 가장 큰 파급력을 보여준 래퍼 중 한 명이다. 2016년, “응프리스타일 (Eung freestyle)”이나 오왼 오바도즈(Owen Ovadoz)의 “긍정” 등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로 기대감을 키운 그는, 2017년 들어 리스너들이 기대하는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줬다. 올해 초 발표된 첫 EP [Coming To You Live]는 디피알 라이브만의 세련된 랩스킬을 비롯한 독보적인 음악적 색채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소속 크루 디피알(DPR)의 멤버들이 만든 뮤직비디오는 그의 음악을 완벽에 가깝게 예술적으로 표현해냈다. 이렇듯 올해 디피알 라이브가 자신의 크루와 함께 보여준 퍼포먼스는, 그들이 신진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2017년, 많은 신인 아티스트가 발자국을 남겼지만, 아마 그의 발자국이 가장 뚜렷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오프온오프

싱어송라이터 콜드(Colde)와 프로듀서 영채널(0channel)로 구성된 오프온오프(offonoff)에게 2017년은 신인으로서는 꽤나 준수한 한 해였다. 하이그라운드(HIGHGRND)에 함께 소속된 코드쿤스트(Code Kunst)의 [Muggles' Mansion]에 수록된 “White AnxiEty (Outro)”에서 보여준 그들의 감성은 리스너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어 7월에 발표한 첫 앨범 [boy.]에서는 그 감성을 앨범 단위로 여과 없이 표현해냈다. 자신의 일상을 무드 있는 사운드와 멜로디, 그리고 가사로 드러냄으로써 여러 번 곱씹을수록 진가가 나오는 풍미 넘치는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는 특별한 마케팅 없이, 그저 음악과 뮤직비디오로만 다가갔음에도 대중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원동력이었다. 은은한 음악만큼이나 아마 올해를 기점으로 꽤 긴 시간 잔잔하고 꾸준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소마

소마(Soma)는 첫 번째 EP [Somablu]를 통해 이전에 베리(Verry)의 멤버로 활동했던 과거의 자신을 물속으로 가라앉히고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앨범에서 절제미가 돋보이는 깊은 음색의 보컬을 선보이며 많은 이에게 쉽사리 잊히지 않는 여운과 울림을 안겨다 주었다. 하반기에 발표한 [THE LETTER]를 통해서는 더욱 발전한 음악 기량을 선보이고 있음은 물론,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인 자아까지 드러냈다. 또, 올 한 해 씬 전반에서 다양한 공연 활동을 통해 꾸준히 자신을 어필해왔다. 히피는 집시였다, TK, 리코(Rico)와 같은 개성 넘치는 아티스트들과 자신의 색을 잃지 않으며 좋은 합을 보여준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소마는 이른 시간에 앨범 단위의 결과물들로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뚜렷하게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구원찬

구원찬은 올해 9월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을 발표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피셔맨(Fisherman)이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한 장의 작품을 더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구원찬은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으며, 심지어 두 편의 작품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선보이며 꽤나 주목받았다. [반복]에서는 음악 시장의 유행과 다소 거리가 있는 스타일을 담으면서도 자신만의 색을 알리는 데 성공하였고, [Format]에서는 피셔맨과의 호흡을 통해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통해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보여줬다. 과거 반쿠디(Van Cudi)로서의 짧은 활동 이력보다 지금이 더욱 빛나는 구원찬이기에 이 정도면 올해의 신인 아티스트 후보로도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나 싶다.

예서

유행이나 시류라는 게 있다고는 하지만, 근래 주목받은 많은 알앤비 곡들이 어느 정도 공통된 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위 말해 ‘되는 전략’을 지향하는 음악가들이 많은 셈인데, 그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예서(Yeseo)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나른하고 몽환적인 전자음악 위에서 유영하는 듯한 음성으로 구성된 그녀의 음악은 특정한 장르에 구속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예서 본인이다. 직접 사운드를 구상하고 만들어낸다. 셀프 프로듀싱은 음악가에게 막대한 자유도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자기객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예서는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동시에 꾸준히 탄탄한 내용물의 싱글과 EP를 발표했다. 그녀에게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달

로큰롤과 힙합 간의 장르 구분을 희미하게 하는 신인 아티스트 재달(JaeDal)은 크루 리짓군즈(Legit Goons)의 새 멤버로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잘 짜인 프로모션 체계밖에서 예고없이 등장한 신인이지만, 오히려 그는 오리지널리티와 완성도를 갖춘 양질의 작품을 자신의 승부처로 삼았다. 실제로 그 방식은 유효했다. 출사표와도 같은 앨범 [Adventure]는 다양한 장르적 DNA를 품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장르 문법에만 의존하지 않는 앨범이었다. 이를 매개로 리짓군즈에 합류하게 된 재달은 이후 [Junk Drunk Love]에 참여해 유연한 싱어송라이터로서, 또 확고한 애티튜드를 가진 힙합 아티스트로서 작지만 확실한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Dear Mama” 속 그가 뱉은 가사 구절처럼 ‘개성과 노력이 만나 빛을 발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 올해의 힙합 앨범

도끼

Reborn

도끼(Dok2)의 랩스킬은 확실히 한국힙합 씬에서 정상이다. 더 고무적인 건 그가 자신의 실력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그간 도끼가 발표한 앨범의 완성도는 그 압도적 퍼포먼스에 비해 아쉬운 편이었다. 그중 가장 큰 단점으로 꼽혔던 게 정형화된 가사였다. 하지만 도끼는 [Reborn]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다시 한번 극복했다. “Rollercoaster”, “Hiphop Lover”와 같은 트랙이 대표적이다. 도끼는 앨범에서 내면의 사고를 전보다 더 여실히 드러내며 인상 깊은 랩을 선보인다. 랩을 뱉는 능력이야 언제나 그랬듯 다른 참여진들에 비해 빼어난 편이며, 후렴을 맡은 보컬들 역시 곡에 따라 알맞게 기용되었다. 더불어 앨범 프로듀싱을 총괄한 그루비룸(Groovy Room)과 도끼의 조화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그루비룸은 자신들의 넓은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도끼에게 최적화된 비트를 다양하게 내어놓았고, 도끼는 그 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뛰논다. 현시점에서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래퍼와 프로듀서가 상호보완적으로 서로의 장점만을 흡수했으며, 결과적으로 [Reborn]는 도끼의 커리어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코드쿤스트

Muggles' Mansion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와닿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듀서의 앨범은 청각적 쾌감과 유기성 위주로만 평가되기도 한다. 다른 래퍼 혹은 싱어의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의미 전달은 물론, 만족도 측면에서도 떨어지기에 대체로 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드쿤스트는(Code Kunst)는 항상 앨범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물론, 전작에 비해 아티스트의 개성을 더욱 극대화한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Muggles' Mansion]은 분명 코드쿤스트의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 참여한 열아홉 명의 뮤지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코드쿤스트를 대변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앨범은 프로듀서가 구축할 수 있는 형태 중 가장 발전된 형태 중 하나를 갖춘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더욱 깊어진 사운드와 폭넓어진 게스트 선택, 완연한 기승전결을 갖춘 흐름까지, 코드쿤스트 본인조차 당당하게 명반이라 칭할 만큼 탄탄함을 자랑하는 앨범이다.

화나

FANACONDA

화나는 한국힙합에서 가장 개성이 뚜렷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철저하게 각운에 포커스를 맞추는 가사 작법은 화나만이 가진 무기임과 동시에, 자기복제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둘러싼 한계라고도 볼 수 있었다. 화나는 정규 3집 [FANACONDA]를 통해 그런 자신의 상한선을 갱신했다. 전작들에서 완벽히 계산된 특유의 라이밍은 랩 자체가 주는 청각적 쾌감을 떨어뜨린다는 단점도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플로우 설계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와 달리 이번 앨범에는 자유자재로 톤을 조절함으로써 감정을 표현하는 발전된 랩이 가득하다.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는 현재의 한국힙합에 대한 화나의 비판적 입장이다. 그는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냉소적이면서도 힘 있게 드러낸다. 더불어 김박첼라가 주조한 얼터너티브한 사운드는 그러한 주제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완성된 가사에 프로덕션을 덧입히는 작업 방식은 다른 음악들과 차별화되며, 신선한 구성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이렇듯 앨범 전반적으로 익숙한 사운드를 찾아보기 어려우면서도 일관된 맥락을 형성한다는 점은 화나와 김박첼라가 앨범에 들인 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리짓군즈

Junk Drunk Love

매년 화려함과 팬시함을 중심으로 한 메가 트렌드가 씬을 훑고 지나가면 그 대척점에 선 작품들은 온전히 작품으로서 홀몸인 채로 생사의 기로에 선다. 누군가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영역은 힙합 커뮤니티가 언제나 갈구해오며 한 줄기 빛이 스며들까 주목하고 있는 좁고 기다란 틈과도 같다. 리짓군즈(Legit Goons) 또한 이 길고 좁은 틈 안으로 자신들을 보이기 위해 다년간 고군분투해온 집단 중 하나다. 그들이 올해 발표한 세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Junk Drunk Love]는 여느 때와 같이 여유와 낙관 속에서 탄생했지만, 지난해와는 또 다른 단단함을 갖고 있다. 그들 특유의 단출한 테마로 시작해 작은 소품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전작보다 더 완성도를 갖췄으며, 이 점에서는 멤버 개개인의 발전된 역량이 큰 역할을 해냈다. 냉혹한 현실과 파라다이스의 중간 지점에서 삶을 따뜻하게 관조하거나 냉소적으로 비꼬는 시선조차 청자들에겐 래퍼 개개인의 시야가 아닌 리짓군즈라는 집단의 필터로서 수렴됐을 것이다. [Junk Drunk Love]는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한 집단의 협연이 녹아 있는 앙상블 같은 앨범이다.

김심야와 손대현

MOONSHINE

프랭크(FRNK)의 변칙적인 프로덕션 위에서 특유의 박자 감각과 날카로운 딕션으로 자연스럽게 그루브를 만들어 온 김심야(Kim Ximya)의 랩은 XXX를 단숨에 한국힙합의 기대주로 손꼽히게 했다. 대신 XXX의 실험 정신으로 인해 김심야가 완연한 힙합 무드의 곡을 내놓은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MOONSHINE]이 나왔다. 이 앨범에서 프랭크 대신 김심야와 합을 맞춘 파트너는 다양한 소스를 가미해 곡을 운용하면서도 힙합의 문법을 고수하는 디샌더스(D. Sanders, 손대현)이다. 아이셰이어 라샤드(Isaiah Rashad)와 협업했던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디샌더스는 특유의 샘플링 작법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완성도가 하나같이 준수하다. 탄탄한 프로덕션에 더해진 김심야의 랩은 XXX의 그것과는 달리 곡 전체를 꽉 채우며, 특히 신랄한 비판이 주가 되던 기존의 서술 방식 외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냉소적으로 풀어낸 가사가 인상적이다. 깊은 생각 없이 뱉는 듯하면서도 현상을 직시하는 김심야의 냉철한 시선은 디샌더스가 제공한 세련된 캔버스에 스며들었고, 그 결과 매우 이상적인 작품이 탄생했다.

차붐

Sour

계산된 기믹이 범람하는 시대에 차붐이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방식은 오히려 철저하게 민낯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차붐은 인간 차종혁의 삶을 꾸밈 없이 음악에 옮긴다. 그가 내어놓은 일상적인 언어에는 안산이라는 도시의 복합적 특성이 베여 있고, 정제되지 않은 말투는 특유의 느와르적 무드를 형성하며 청자를 끌어당긴다. 3년 만의 작품 [Sour]의 서사 역시 차붐의 굴곡진 인생을 따라 흘러간다. 중국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하고 돌아온 그는 본인이 맛본 인생의 시큼함을 앨범에 그대로 녹인다. 가사는 여전히 모두를 집중시키는 마력을 지녔고, 찰진 발음과 진한 박자감이 빛나는 동물적 래핑은 더욱 발전해 청각적 감흥을 선사한다. 모든 수록곡이 인상 깊은 가운데, 앨범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소주가 달아”와 “몇 밤 더 자고가”에서의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스토리텔링은 특히나 짙은 여운을 남긴다. 더불어 마진초이(Margin Choi)가 주축이 된 프로덕션은 투박함과 트렌드를 오가며 테마에 맞는 사운드를 구현해냈고, 피처링 기용도 구성적으로 훌륭했다. 한 편의 B급 영화와 같은 [Sour]는 차붐 스스로 뛰어난 감독, 작가, 배우임을 증명한 앨범이다.

4. 올해의 힙합 트랙

재지팩트

하루종일

재지팩트(Jazzyfact)의 “하루종일”은 올해 힙합 팬들의 마음속에 가장 찡하게 남은 곡이 아닐까? 제대 이후 꽤 오랜만에 자신의 트랙들을 세상에 내보낸 시미 트와이스(Shimmy Twice)와 군입대를 앞둔 빈지노(Beenzino)라는 조합 자체도 울컥했지만, 이를 위로하는 듯한 사운드와 그에 걸맞게 빈지노가 이끌고 가는 감정선은 역설적으로 오랜만에 팬들과 재회한 재지팩트를 더욱 그립게 만들었다. 물론, 곡의 배경적인 측면을 배제하더라도, 기존 재즈 샘플링에서 머물던 시미 트와이스의 스펙트럼이 더 넓게, 완숙하게 발전했다는 점, 빈지노의 곡 구성 능력이 돋보였다는 점 등 올해를 대표하는 힙합 트랙으로 손색이 없다.

우원재

시차 (Feat. Loco & Gray)

이제 '밤새 모니터에 튀긴 침이 마르기도 전에'라는 구절을 모르는 대한민국 청년은 아마 없지 않을까? 2017년, “시차”는 우원재를 비롯해 많은 이에게 의미가 있는 곡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인지도가 없던 그는 <쇼미더머니 6>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만큼 여러 꼬리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이야기만 한다', '소화할 수 있는 비트가 제한적이다' 등 그의 한계는 쉽게 규정되었다. 그러나 우원재는 “시차”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그어진 자신의 한계를 가볍게 깨부쉈다. 그레이(Gray) 특유의 밝은 비트를 인기를 얻으며 달라진 자신의 모순적인 상황을 시차에 빗대며 소화했고, 어두운 무드의 비트에 우울과 관련된 주제가 아니면 랩을 할 수 없다는 편견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를 응원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통쾌한 한 방이었다. 대중적임과 동시에 음악적인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시차”는 올해 가장 널리 울려 퍼지며 가장 많은 이의 마음속에 박힌 힙합 트랙이었다.

도끼, 박재범

니가 싫어하는 노래 (MOST HATED)

각자의 영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실력을 가진 도끼(Dok2)와 박재범(Jay Park)은 각각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와 앰비션 뮤직(Ambition Musik), AOMG와 하이어 뮤직(H1GHR Music)을 운영하는 CEO다. 각자 레이블 두 군데를 운영하는 것이 힘에 부칠 만도 하지만, 한국힙합 씬을 대표하는 허슬러인 도끼와 박재범은 올해 또한 눈부시게 활약하며 씬의 주인공 역할을 소화해냈다. 더불어 이들은 <쇼미더머니 6>에 동반 출연해 팀을 구성했고, 그들의 팀워크는 방송에서도 충분히 돋보였다. “니가 싫어하는 노래 (Most Hated)”는 ‘도박’이 프로듀서 특별 공연과 함께 공개한 신곡이었다. 두 뮤지션을 같은 곡에서 만나볼 기회가 종종 있긴 했지만, “니가 싫어하는 노래 (Most Hated)” 속 이들의 조화는 여전히 새롭다. 도끼의 목소리로 시작돼 박재범의 목소리로 끝나는 곡에서 두 보스는 절정의 스웩을 대조되는 스타일로 뱉고, 이들의 화려한 플로우는 그루비룸(Groovy Room)의 세련된 트랩 비트에 잘 어우러진다. 자칫 뻔할 수 있는 조합임에도 대다수 청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을 것이기에 제목과는 달리 분명 누구도 싫어하기 어려운 노래다.

김심야

Career High (Feat. Cautious Clay)

냉소적인 감정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감정이다. 그 냉소 안에 적절한 이유가 첨부되지 않으면, 자칫 양비론자로 치부되기도 하고, 자칫 정념에 의한 불만으로 치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심야(Kim Ximya)의 “Career High”는 냉소적인 감정만으로 청자들의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마법 같은 노래다. 칼로 베는 듯한 김심야의 래핑과 더불어, 모순을 꼬집는 듯한 직설적인 가사, 그리고 커셔스 클레이(Cautious Clay)의 비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또한, 애매하게 끝나는 벌스와 커셔스 클레이가 1분가량 선보이는 코러스와 함께 이어지는 아웃트로는, 그의 복잡한 감정을 청자에게 그대로 전하는 듯하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설득되게 하는 신비한 노래다.

차붐

리빠똥

본토와 한국힙합 씬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차붐은 한국, 그 안에서도 안산에서의 지역적 정서를 효과적으로 음악에 서술한다. 김용성 작가의 1970년대 소설 <리빠똥 장군>에서 착안한 트랙 “리빠똥”은 그만의 캐릭터가 가진 호소력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곡이다. 전주가 흐르는 순간, 부둣가의 비린내가 연상되는 마진초이(Margin Choi)의 탁월한 붐뱁 프로덕션은 이 곡이 오로지 차붐만을 위한 곡임을 설명하는 듯하다. 이는 차붐의 입에서 나오는 날것에 가까운 랩과 한 몸이 되어 투박함과 세련됨을 한꺼번에 안겨준다. 그리 밝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똥파리에 비유함과 동시에 높이 날아가길 바라는 그의 메시지는 직설적인 만큼 가슴 깊숙이 와 닿으며, 차붐의 본능적인 래핑은 마진초이가 빚어낸 살벌한 분위기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변주와 함께 진행되는 세 번째 벌스는 가히 압권으로, 차붐은 이 곡에서 자신의 강점을 노골적으로 어필하며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TFO

원뿔

한국어 랩이 나오는 곡을 들으며 그 안에 담긴 구조나 구성에 감탄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원뿔”이 그렇다. 이 곡은 여러 장치를 통해 청각적 쾌감을 준다. ‘가 / 어가 / 들어가 / 려들어가 / 빨려 들어가’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빨려 들어가 도착하는 곳이 원뿔인데, 구성적으로 원과 뿔이 결합한 느낌을 주며 말 그대로 하나의 원뿔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상상하든 그것은 듣는 이의 자유겠지만, 그만큼 듣는 이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주는 것도 이 곡이 지닌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가사가 묘사하는, 눈앞에 그릴 수 있는 무언가와 곡의 모습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점 역시 “원뿔”을 들어봐야 하는 이유다.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막상 트랙과 랩은 담을 건 다 담으면서도 멋진 리듬으로 몸을 들썩거리게 한다.

5. 올해의 알앤비 앨범

히피는 집시였다

나무

음악 장르 앞에 ‘한국적’이란 말을 덧붙이면 퓨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낳은 끔찍한 혼종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히피는 집시였다의 정규 1집 [나무]는 굉장히 묘하고 이상적인 결과물로 현시대의 트렌드인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매우 한국적인 분위기를 띤다. 팀은 어색함 없이 동양적 분위기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우선, 감독 역할을 한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가 여백을 적절히 살리는 식으로 뼈대를 굳건히 세운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셉(Sep)은 한국을 대표하는 슬픔의 정서인 ‘한’이 서려 있는 듯한 보컬로 몰입도를 배가한다. 독특한 소리로 유지되는 일관된 무드, 진성과 가성을 넘나들며 표현되는 절제된 감정, 화려함 없이 담담하기만 한 보컬이 함께 있고, 이를 통해 듣는 이를 전율케 한다. 또한, 대부분 한글로 이루어진 가사는 구체적이지 않아 되려 가슴 깊이 여운을 남긴다. 목소리를 보탠 오르내림(OLNL)과 소마(SOMA) 역시 평소의 폼보다 더 활약했고, 색소폰 연주자 김오키의 피처링은 화룡점정이었다. 그 결과, 히피는 집시였다는 트렌드를 흡수하면서도 결코 뒤따르지 않았고, 반대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음악을 창조하는 자신들의 방식에서 영감을 얻게 했다.

리코

White Light Panorama

리코(Rico)는 공식적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잠재력이 보였다. 혼자서 제작하고 홍보한 믹스테입에서 드러난 매력적인 음성과 그루브감은 알앤비 특급 신예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그는 데이즈 얼라이브(Dave Alive)와 계약을 맺었고, 첫 정규 앨범 [The Slow Tape]은 평단의 찬사를 자아냈다. 단순히 트렌드을 좇는 게 아닌, 알앤비 음악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담긴 작품이었다. 그는 그러한 지향점을 2집 앨범 [White Light Panorama]에서 더욱 확장시켰다. 90년대 네오소울의 질감, 트랩과 퓨처, 얼터너티브 알앤비적인 사운드, 그의 장기인 끈적끈적한 무드까지 담아냈다. 앨범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사운드의 향연은 리코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합일된다. 만족스러운 곡들로 가득한 [White Light Panorama]를 2017년에 가장 탄탄한 알앤비 앨범 중 하나로 꼽는 데 이견을 보일 사람이 있을까?

오프온오프

boy.

콜드(Colde), 영채널(0channel), 두 명의 94년생 뮤지션으로 구성된 듀오 오프온오프(offonoff)는 딱 요즘 느낌의 음악을 하는 팀이다. 어떤 장르를 지향하니, 무슨 스타일을 추구하니와 같은 말로 자신들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한다기보다는 ‘mood’라는 말 그 자체에 충실하려는 쪽에 가깝다. 첫 정규작 [boy.]는 그런 오프온오프의 노선이 뚜렷하게 드러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을 두고 전자음악 혹은 그에 기반을 둔 얼터너티브 알앤비라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팝 같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장르로 정의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칠한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는 적당한 노랫말로 청자들의 감수성을 은은하게 자극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아마 많은 이가 새벽에 이 앨범을 들으며 오프온오프만의 영한 서정성에 스르르 빠져들었을 것이다.

라드 뮤지엄

Scene

딘으로 대변되는 경향이 있던 크루 클럽 에스키모(Club Eskimo)는 올해 멤버 각자의 작품 활동을 통해 그 실체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라드 뮤지엄(Rad Museum)도 그중 하나로, 이전까진 가장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Scene]은 그런 그를 둘러싼 베일을 한꺼풀 벗겨낸 흥미로운 첫 결과물이다. 우선, 어느덧 공간감을 통해 몽환적인 무드를 강조하는 식으로 생겨버린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전형을 비껴간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어쿠스틱한 악기 구성과 로파이한 톤을 유지하고, 각 곡에 레트로한 로큰롤(“ㅗ매드키드ㅗ”)이나 신파적 발라드(“Dancing In The Rain”) 등 뚜렷한 특이점이 있는 서로 다른 서브 장르를 무드 있게 녹여낸다. 그 와중에 가오가 육체를 지배한 것만 같은 ‘인디 음악 하는 남자‘라는 페르소나는 전체 흐름을 명확하게 관통한다. 얼터너티브의 시대에서 한국의 알앤비도 여기까지 왔다.

신세하

7F, the Void

감각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신세하라는 음악가의 표현력이나 자신의 영감을 담아내는 기술이 발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신세하가 올해 발표한 [7F, the Void]에는 전작보다 훨씬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복고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마음에 들지 않아”부터 신세하만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7F”에서의 긴장과 전개, 흥미로운 사운드 구성이 빛나는 발라드 넘버 “Balcony” 등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과거를 연상케 하면서도 동시에 디테일을 통해 진일보했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장르 문법이나 결 자체가 올해 등장한 다른 알앤비 앨범들과는 확실하게 다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이 충분하나, 그것들을 2017년이라는 시점에서 어떻게 재현하고 풀어냈는가까지 감안하면 더욱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니셔스

사이

비니셔스(Vinicius)가 걸어왔던 행보를 돌이켜 보건대, 그에겐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해 보인다. 그는 재지 아이비(Jazzy Ivy), 김아일(Isle Qim)과의 협업은 물론, 자신의 믹스테입을 통해 그 누구도 함부로 따라 할 수 없는 본인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발매된 정규 1집 [사이]은 그런 비니셔스가 보컬과 프로듀싱은 기본, 악기 하나하나까지 직접 연주하며 모든 걸 스스로 해낸 앨범이다. 앨범은 첫 트랙인 “걸어오는”부터 마지막인 “가까이 있어”까지, 한결같은 무드를 이어나간다. 비니셔스의 보컬 역시 곡의 무드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어느 소스도 예사롭게 넘길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구성도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비니셔스만의 사운드로만 가득 차 있어 올해 한국 알앤비 씬에서 가장 독보적인 앨범이었다.

6. 올해의 알앤비 트랙

박재범

YACHT (k) (Feat. Sik-K)

박재범(Jay Park)하면 많은 것이 생각나는데, 그중에는 여름 시즌 송도 있다. 그는 더운 계절에 걸맞은 시원한 알앤비 트랙들을 꽤 자주 만들어왔다. 대표적으로는 “My Last”, “Solo” 같은 곡이 있으며, “YACHT (k)” 역시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이지한 2017년형 팝 알앤비 넘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차차 말론(ChaCha Malone) 특유의 하이파이함에 청량감까지 더한 프로덕션이나,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저 바닷가에 가서 놀자는 박재범의 무해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섹시한 뉘앙스나, 결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여기에 신흥 섹시 아이콘 하이어 뮤직(H1GHR MUSIC)의 식케이(Sik-K)의 적절히 어우러지는 퍼포먼스가 더해지며 좋은 ‘케미’를 선보인다. 덕분에 박재범은 올해도 모두가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계절 노래를 내놓을 수 있었다.

서사무엘

Off You

서사무엘(Samuel Seo)은 다양한 음악 요소들을 조합해내는 프로덕션, 다양한 형태의 보컬을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한 아티스트다. 두 장의 솔로 앨범 [Frameworks], [EGO EXPAND (100%)], 김아일(Isle Qim)과 함께한 EP [Elbow] 등 서사무엘은 특정한 영역에 구속되지 않는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Off You"은 그가 지닌 수많은 방향 중 팝적인 영역으로 나아간다. 예쁜 소리와 훵키한 리듬과 보기 좋게 조화한다. 훅은 간결하지만 그만큼 귀에 빨리 익고, 중독적이다. 직관적인 소리와 전개로 인해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곡이지만, 이 또한 서사무엘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갈래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면서도 그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히피는 집시였다

히피는 집시였다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독특한 음악을 하는 팀이다. 이들의 음악은 얼터너티브라는 현재 대중음악의 큰 트렌드와 맞닿아 있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장르 음악가들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나무]의 타이틀곡 “점”은 이들의 색을 확인하기에 가장 적합한 곡이다.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는 최대한 악기를 덜어낸 구성을 통해 정적인 느낌의 사운드를 연출한다. 여기에 보컬 셉(Sep)은 ‘점’이라는 타이틀에서 비롯된 심상을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한글 가사로 풀어냄은 물론, 화려함과 큰 기교 없이 담백한 보컬을 담아낸다. 이처럼 히피는 집시였다는 청자들에게 자신들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낼 공간을 남김으로써 곡의 끝을 맺는다. 그 어떤 얼터너티브 알앤비보다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 노래다.

오프온오프

gold (Feat. Dean)

오프온오프(offonoff)의 “gold”는 딘(Dean)이 함께한 노래다. 딘의 조금은 퇴폐적이고 치명적인 이미지에 비하면 상당히 밝은 편에 속하는 곡인데, 그래서인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채널(0channel)의 미니멀한 비트, 자신의 자유로운 음악관을 표현한 콜드(Colde)와 딘의 가사, 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신선한 멜로디 라인이 한데 어우러진다. 콜드가 곡의 바이브와 조화를 이루는 편이라면, 딘은 조금 더 스킬풀하게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아침이 밝아오는 듯한 느낌의 듣기 편함과 동시에 짜임새 있는 트랙이다. 비록 딘의 파트가 빠져 있지만, 원테이크로 촬영된 뮤직비디오 또한 자전거를 타는 모습과 그 속의 풍경을 통해 곡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 것이 돋보였다.

피제이

나비야 (Feat. Zion.T)

자이언티(Zion.T)는 이제 이문세와 콜라보할 정도로 영역이 넓은 팝 아티스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올해도 개인 앨범 [OO]을 팝과 알앤비의 경계를 넘나들며 준수하게 만들어냈으며, 기존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가져가고 있다. “나비야”는 그 [OO]의 대부분 곡을 함께 주조한 피제이와 자이언티의 또 다른 합작품이다. 과하지 않은 어반한 악기 구성, 리드미컬함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것이 최근 들어 자이언티의 음악에서 비교적 보기 어려웠던 보컬 스타일이 세련됨을 자아낸다.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왜 ‘나비야’라고 부를까?’라는 엉뚱한 상상에서 시작된 노래답게 스튜디오피보테(Studiopivote)와 합작한 일반적이지 않은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도 이에 한몫한다. 질감과 뉘앙스를 온전히 살릴 줄 아는 두 아티스트의 예술적 감각이 빛난 순간이다.

리코

Paradise

최근 들어 국내 알앤비 씬에서 심심치 않게 재현 혹은 재해석되고 있는 게 네오 소울이다. 리코(Rico)의 “Paradise”는 기존의 그 어느 곡들보다도 네오 소울이 본연의 음악적인 맛을 충실히 잘 살려낸 트랙이다. 우선, 프로듀서 마일드비츠(Mild Beats)와 키보디스트 파마제이(Pamajay)가 만들어낸 중독적인 그루브가 확 끌어당긴다. 여기에 리코는 장르 음악을 대표하는 보컬리스트들이 선보이곤 했던 인토네이션과 함께 선을 넘을 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보컬을 구사한다. 더불어 달콤한 사랑의 순간을 악마, 선악과와 같은 단어들로 풀어낸 가사까지, “Paradise”는 네오소울이라는 장르만이 가진 독특한 감흥을 제대로 선사한다. 이전에 슬로우잼에 치우쳐 있던 리코라는 아티스트가 틀을 깨고 확연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한국 알앤비 음악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트랙.

7. 올해의 프로듀서

코드쿤스트

시그니처 사운드는 프로듀서가 트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는 직접적인 장치다. 그러나 코드쿤스트(Code Kunst)는 시그니처 사운드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트 그 자체로 스스로를 충분하게 어필한다. 그에게 2017년은 음악가로서 가진 역량을 더욱 여실히 보여준 해였다. 하이그라운드(HIGHGRND)에 입단한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앨범 [Muggles' Mansion]은 그간 보여준 색깔을 좀 더 정제하고, 힙합 사운드뿐만 아니라 록, 알앤비 등 다른 서브 장르까지 폭 넓게 보여준 앨범이었다. 그런 코드쿤스트의 스펙트럼은 리스너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한 라이브에서 그는 자신의 앨범을 명반으로 칭한 바 있다. 보통은 낯뜨거울 만한데, 그렇지 않은 건 아무래도 [Muggles' Mansion]이 정말 괜찮은 앨범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루비룸

그루비룸(Groovy Room)은 2017년 가장 많은 곡을 만든 프로듀서이자,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프로듀서다. 우스갯소리로 그들을 ‘비트공장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칭찬이 될 수 있는 건 프로듀싱한 모든 곡이 하나같이 하이파이했기 때문이다. 올해 발표한 첫 EP [EVERYWHERE]의 제목처럼 그루비룸은 장르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어디에서나 가장 눈에 띄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버벌진트(Verbal Jint)부터 더블케이(Double K), 식케이(Sik-K), 박재범(Jay Park), 그리고 넬(Nell)까지,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서로의 색깔에 위화감 없이 녹아드는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젊다. 2017년에 보여준 행보는 앞으로 그들이 걸어갈 길에 비하면 평범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비룸이 2017년 들어 선보인 퍼포먼스들은 한국힙합 씬 내외로 프로듀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레이

다작을 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순도가 높았다. 그레이(Gray)는 여러 굵직한 작품에 힘을 더했다. 지투(G2)의 [G2`s Life], 로꼬(Loco)의 [BLEACHED], 비와이(BewhY)의 [The blind star], 도끼(Dok2)의 [CRAZY]가 대표적이다. 이렇듯 그레이는 한 해 동안 싱글컷보다는 앨범 단위의 작업에 집중하며 여러 래퍼와 호흡을 맞췄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반기 최고의 히트 싱글인 “시차 (We Are)”로 우원재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기도 했다. 확실히 그는 대중의 입맛과 마니아들의 취향을 동시에 사로잡는 몇 안 되는 프로듀서다. 작년의 “Forever”에 이어 올해는 “시차 (We Are)”까지, 매년 히트 넘버를 창작하는 프로듀서가 이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이름을 올릴까.

피제이

소리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프로듀서/비트메이커에게 자신만의 사운드와 톤이 있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은 대개 해당 장르가 가진 요소들에 함몰되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피제이(PEEJAY)는 자신만의 톤과 무드가 분명한 프로듀서다. 그간 많은 활동을 해왔지만, 빈지노(Beenzino)와의 합작으로 이름을 알린 그의 스타일은 깔끔하고 명징한, 동시에 맑은 사운드로 정의될 수 있다. 올해 발표한 2집 앨범 [WALKIN` Vol. 2]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적 톤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객원 음악가를 통한 사운드의 확장 및 구상했던 사운드를 실현해내는 역량을 여지없이 풀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쿠마파크(Kuma Park)를 대동해 재지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기도, 자이언티(Zion.T)의 음성으로 사운드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더불어 외부 작업도 꾸준히 했다. 자이언티(Zion.T)의 [OO]에서 핵심 프로듀서로 활약했고, 태양, 윤석철, 정기고(Junggigo)의 곡을 작업했다. 피제이에게 2017년은 눈에 띄는 작업으로 가득한 해였다.

제이플로우

매년 한국 흑인 음악 씬은 레퍼런스 논란에 휩싸이곤 한다. 장르 음악 역시 산업의 분야로 흡수되면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소리를 찾고자 하는 아티스트들은 존재한다.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가 그렇다. 그는 누구도 함부로 따라 할 수 없는 본인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레퍼런스 관행에 부정적이고, 오랫동안 컴퓨터에 앉아 시퀀서를 키고 음악을 만드는 일을 규칙적으로 해오며 음악가로서의 성실성을 유지해온 덕이다. 그 결과, 올해 제이플로우는 자신이 구축한 음악관을 갖고서 셉(Sep), 소마(Soma), 민제(Minje), 짱유(Jjangyou)와 같이 개성 넘치는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한국 흑인 음악만이 보일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성과를 보였다. 씬에서 ‘얼터너티브’라는 수식어가 가장 적합한 실험성 강한 프로듀서다.

김박첼라

올해 가장 이슈가 된 앨범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화나의 [FANACONDA]다. [FANACONDA]가 주목을 받은 이유로는 그안의 메세지도 있지만, 김박첼라가 전담한 프로덕션 측면의 비중도 상당히 컸다. 화나의 플로우, 가사에 맞게 연주된 김박첼라의 비트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감정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비트는 단순 룹의 반복이 아닌, 변주를 통해 기승전결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이 같은 모습은 당연히 한 곡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앨범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이렇듯 기존 힙합 작법에서 벗어나 얼터너티브한 음악을 추구한 김박첼라는, 화나의 말처럼 [FANACONDA]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마치 화나의 랩과 교감을 하는 듯한 김박첼라의 비트는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음악이 많아지는 추세에 무언으로 메세지를 던진 듯하였고, 그 메세지는 2017년 리스너들의 마음속에 그의 이름을 당당히 새겨놓았다.

8. 올해의 콜라보레이션

그루비룸

XINDOSHI (Feat. Loopy, MASTA WU, 김효은, Sik-K)

그루비룸(Groovy Room)의 첫 앨범 [EVERYWHERE]는 많은 아티스트와의 참신한 협업을 거쳐 발표됐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곡이라면 단연 “XINDOSHI”다. 그루비룸과 함께 곡을 구성하는 주체들은 언뜻 보면 서로 섞이기 어려워 보일 만큼 접점이 없으면서도 그 개성이 뚜렷한 편이다. 하나, 그루비룸의 프로덕션이 곡 안에서만큼은 이들을 한 팀으로 보이게 한다. 그루비룸의 레이블 동료인 식케이(Sik-K)는 비트에 한 몸인 듯 딱 달라붙는 훅을 담당했으며, 유난히 유려한 플로우를 탄 루피(Loopy)와 끈적한 래핑의 대표격인 마스타우(Masta Wu)는 트랩 비트에 맞춰 차례로 고유의 방식대로 벌스를 뱉는다. 변주 구간 이후, 붐뱁 리듬 위에서는 김효은이 커리어를 통틀어 손꼽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마무리 짓는다. 각 래퍼가 등장하는 구간마다 스타일에 맞춰 변화를 주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그루비룸의 곡 구성 능력, 그리고 적재적소에 아티스트를 배치한 그들의 안목이 빛나는 트랙이다.

서사무엘, 김아일

Mango

“Mango”는 아티스트의 아티스트 서사무엘(Samuel Seo)과 김아일(Isle Qim)이 합작한 작품이다. 왜 그들은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라고 불릴까? 단연 독보적인 색깔 덕분이다. 그렇다고 둘이 함께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장담하긴 또 어려운 노릇이다. 서로 다른 뚜렷한 색깔을 적절히 섞어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건, 자칫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색이 될 수 있다는 리스크도 어느 정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Mango”는 그러한 리스크보다는 메리트가 큰 곡이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두 아티스트의 독보적인 개성이 훵키한 비트 위에서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서사무엘의 드라이한 톤에 김아일의 통통 튀는 톤이 쌓는 화음은 마치 그들이 원래 한 팀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고 완벽했다.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들이 개성과 화합을 동시에 보여주며 환상의 ‘케미’를 터뜨린 노래.

넉살, 한해, 라이노, 조우찬

N분의 1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쇼미더머니>의 매력은 단연 시즌마다 출연진들의 화려한 콜라보레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역시 그 매력은 유효했는데, 그중 가장 선전한 곡은 “N분의 1”이다. 팀의 프로듀서인 다이나믹듀오(Dynamic Duo)가 전체적인 곡 구성을 맡았고, 그 덕에 듣기 편한 비트 위에서 가볍게 던지는 훅은 대중과 매니아 모두를 사로잡을 만큼 중독적이었다. 이미 실력을 입증받았기에 어쩌면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해와 넉살은 완성도 있는 랩을 능숙하게 뱉어내 예상보다 더 크게 활약했고, 이번 시즌을 통해 새롭게 이름을 알린 라이노(Ryno)와 조우찬 또한 탄탄한 기본기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처럼 루키와 베테랑, 그리고 OG의 만남은 생각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냈고, 2017년의 힙합 음악 중 가장 사랑받은 노래가 되었다. 발매된 이후 꽤 오랜 기간 음원 차트에서 순위권을 차지했다는 사실과 인기 아이돌들에 의해 꾸며진 리믹스 무대까지 고려하면 이 콜라보레이션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차붐

에쿠스 (Feat. Paloalto, Swings, Deepflow)

자신들의 부를 외제차로 과시한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 이후, 한국힙합 가사에서 자동차는 더 이상 신선한 소재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매번 자신만의 화법으로 특유의 정서를 보여준 차붐은 “에쿠스”에서 그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에쿠스는 한국 사회의 사장님들을 대표하는 차종이다. 차붐은 그 에쿠스를 통해 사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면서도, 투박한 본인만의 색을 지킨다. 그래서 이 곡은 단순한 차 자랑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며, 그 균형을 한국 주요 힙합 레이블의 사장들이 함께 잡아준다. 팔로알토(Paloalto), 스윙스(Swings), 그리고 오토튠이 섞인 랩으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딥플로우(Deepflow)까지, 의외로 한 곡에서 다 같이 보는 걸 기대하기 어려운 세 명의 사장들은 하나의 주제 아래에서 제각기 다른 내용을 각자의 능숙한 스타일로 풀어낸다. 프로듀서 마진초이가 설계한 트랩 사운드 위에 뭉친 레이블 대표 네 명의 시너지는 올해 그 어떤 콜라보레이션보다도 묵직했다.

썸데프

Ring Ring Ring (Feat. Verbal Jint, Paloalto, DPR LIVE & Car, the garden)

콜라보레이션의 가장 큰 매력은 참여진의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썸데프(Somdef)의 “Ring Ring Ring”은 구성과 화법이 가장 다채로운 트랙이다. 버벌진트(Verbal Jint), 팔로알토(Paloalto), 디피알 라이브(DPR LIVE), 카더가든(Car, the Garden)은 곡의 주인인 썸데프의 조율 아래 각자의 시야를 보여준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스토리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탁월한 랩 메이킹은 청자들에게 쾌감을 전한다. 매끄러운 사운드로 화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썸데프의 역할도 우수하다. 신과 구가 연결되는 듯한 구성원의 조합 역시 절묘하다. 확실히 “Ring Ring Ring”은 2017년 발표된 협업 트랙 중 가장 위트 있는 곡임과 동시에 가장 과소평가된 콜라보레이션 트랙이다.

히피는 집시였다

지네 (With 김오키)

히피는 집시였다의 모든 음악이 다 그렇지만, “지네”는 유독 기묘한 실험으로 다가온다. 펑퍼짐한 드럼과 날카로운 일렉 기타로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가 주조한 록적인 프로덕션, 본인조차 새로운 시도였다는 보컬 셉(Sep)의 가성에 기댄 변조된 가창, 그리고 단 세 테이크만에 녹음을 끝냈다는 색소포니스트 김오키의 자유 연주까지, 모든 것이 그렇다.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사이버펑크적 요소를 녹인 뮤직비디오도 감안하면 레퍼런스를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셉의 목소리와 김오키의 연주가 격정적으로 뒤섞이는 후반부에서는 회한에 가까운 선명한 감정선이 압도적으로 용솟음친다. 어쩌면 말뿐인 얼터너티브 알앤비들 속에서 진짜 한국형 얼터너티브 알앤비는 이런 게 아닐까.

9. 올해의 과소평가된 앨범

도넛맨

R A I N B O W

도넛맨(Donutman)은 2008년 첫 믹스테입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만인 2017년 9월, 첫 앨범 [R A I N B O W]를 발표했다. 오랜 기간 신인에 가까운 신분이었던 도넛맨을 따라다닌 건 ‘무색무취’, ‘심심함’과 같은 단어였으나, 그는 이 앨범을 통해 본인이 추구하는 ‘순도 100%’의 음악을 실천한다. 그로써 앨범 단위 작업물에서 단조로울 거라는 우려를 당당하게 종식시켰다.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한 발음을 비롯해 출중한 기본기가 앨범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갔고, 자극적인 양념으로 무장된 동시대 음악들과는 사뭇 다른 노선을 구축했다. 깔끔한 리듬감을 주무기로 한 플로우 디자인은 견고함 그 자체로, 도넛맨이 소모되지 않고 역사에 오롯이 남겨질 음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더불어 프로듀서 왜냐구(Whenya9)가 전담한 미니멀하고 맑은 프로덕션은 흔들림 없이 침착한 도넛맨의 퍼포먼스와 만나 심플의 미학을 보여준다. 단정한 질감 위주의 사운드에 녹아든 도넛맨의 담백한 톤까지, 듣기 편하고, 듣고 싶고, 듣게 되는 음악의 좋은 예가 여기 있다.

크림빌라

Creamtopia

크림빌라(Cream Villa)는 한국의 힙합 감상자 대부분이 동시대에 향유하지 못한 90년대 동부 힙합의 ‘붐뱁 사운드’를 눈앞에 그려낸다. 2015년에 발표했던 [In The Village]에 이어 내놓은 [Creamtopia]에서도 그러한 흐름을 이어간다. 트렌디한 사운드를 차용한 "내 인생 OK (Shame on u)"와 "Lotto", 독설로 유명한 요리연구가 고든 램지(Gordon Ramsay)를 컨셉으로 한 "Ramsay"와 같은 트랙들은 붐뱁 사운드로 지나치게 둔탁해지는 질감을 환기시킨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유지하며 '크림빌라 사운드'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어간다.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음악 씬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고집스러운 사운드에 만족할 것이다.

TFO

ㅂㅂ

TFO의 앨범 [ㅂㅂ]을 무작정 레프트 필드, 얼터너티브, 대안과 같은 단어로 퉁치기는 아깝다. 서사로 치면 앨범 안에는 유머도, 냉소도, 비판도 있으며, 음악으로 치면 구조에서 오는 흥미, 견고하게 만들어진 소리의 구성, 그것이 트랙별로 옮겨 다니는 층위에서 발생하는 케미 같은 것들이 있다. 뻔하지 않다는 것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순 없지만, 이 앨범은 뻔하지 않은 동시에 재미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이미 몇 매체가 [ㅂㅂ]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과정에서 앨범 자체에 관한 것보다 앨범을 둘러싼 이야기가 더욱 중심이 되는 듯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앨범은 힙스터가 아니어도, 음악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나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구원찬, 피셔맨

Format

인상 깊은 등장을 선보인 구원찬이 프로듀서 피셔맨(Fisherman)을 만나 발표한 프로젝트 앨범이다. 피셔맨은 우주비행(Wybh)의 멤버인 동시에 지금까지 여러 곡을 통해 대중 앞에 등장했던 프로듀서다. 자신이 쓴 곡이 멜론 1위를 경험한 동시에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 서울 베이스캠프 참가자로 뽑히기도 했었다. 그만큼 피셔맨의 음악엔 골수 음악 팬이 좋아할 만한 요소와 대중적인 요소가 모두 있다. 구원찬이 이를 자신의 목소리로 잘 컨트롤하고, 두 사람이 함께 좋은 호흡을 맞춘 덕분에 멋진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재즈나 신스팝, 전자음악의 요소를 두루두루 사용하여 곳곳에 배치하면서도 간결하게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 역시 구원찬의 깔끔한 보컬이 그만큼 정돈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을 더 듣고 싶어지게 하는 싱그럽고 산뜻한 앨범이다.

신세하

7F, the Void

신세하는 가수이자 작곡가, 비트메이커, 프로듀서다. 신세하 앤 더 타운(Xin Seha & The Town)의 프론트맨이자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음악가다. 2년 전에 발표했던 첫 정규 앨범 [24Town] 이후 2년 만에 발표한 EP [7F, the Void]는 신세하가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주는 듯하다. 장르적 결로 보았을 때 그가 하는 음악과 연관 있는 음악가 자체가 많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 희소성과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신세하는 그에 기대 음악을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 [7F, the Void]는 장르의 매력은 물론, 음악가 자체가 지닌 매력, 그리고 디테일에서 오는 쾌감까지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올해의 과소평가된 앨범 후보에 오르게 됐는데, 동시에 올해 놓쳤다면 정말 아쉬웠을 앨범이라는 타이틀도 잘 어울린다.

슬릭, 던말릭

FOMMY HILTIGER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연말이 되면 간사하게도 고작 열 달 전쯤을 조금은 희미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그 해를 떠올릴 때 기억되기 위해선 가을쯤에 작품이 나오는 게 좋다는 말이 마냥 우스갯소리가 아닐 정도다. 1월에 발표된 슬릭(Sleeq)과 던말릭(Don Malik)의 [FOMMY HILTIGER]는 그 점에서 2017년의 힙합 씬을 논할 때 잊히면 아쉬울 앨범이다. 컨셉과 진행 과정상에서의 문제로 발표될 기회를 얻지 못했던 트랙들을 콜라주 식으로 묶어놨다지만, 앨범은 의외로 일관된 톤앤매너를 갖추고 있다. 두 래퍼는 여덟 트랙에 걸쳐 젊음의 향기가 뚝뚝 묻어나는 다양한 사고와 감정을 섬세하게 녹여낸다. 여기에 앤더슨팩(Anderson .Paak)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세션 중심으로 훵키하게 꾸린 첫 트랙 “Wonderland”로 시작하여 다양한 프로듀서가 다채롭게 꾸린 트렌디한 프로덕션까지 더해지니 참여한 모든 이의 반짝반짝 빛나는 재기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따름이다.